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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창] 임진왜란_정승열 법무사(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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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선용 기자 | 2022.06.07 09:35 입력

정승열 법무사.jpg


※ 외부 기고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올해는 한·일·중 삼국이 전후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430년이 되는 해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게기로 미·중 관계와 중.일 관계가 심상치 않고, 또 북·중 관계가 밀착되었으며, 새 정부들어 남북관계는 살얼음판이다.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몰락한 다이묘와 호족과 무사 등의 불만을 해소하고, 관심을 해외로 돌리려고 분로쿠 원년(1592) 명나라 정복과 조선 침략전쟁을 벌였는데, 이것을 일왕의 연호인 분로쿠·게이초의 역(文禄·警長の役)이라고 한다. 우리는 임진. 정유재란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명을 정복하러 가는 길을 빌려달라는 도요토미의 정명가도(征明假道)를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치부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전국 통일 후 몰락한 다이묘와 호족, 일반 무사 등의 불만을 해소하려고 했지만, 이미 대항해시대에 맞춰서 유럽에서 개발한 삼각형 모양의 돛대가 3개인 범선 카락(Carrack)과 45개의 돛대를 갖추고 포대를 탑재할 수 있는 갤리온(Galleon)의 구입을 시도했다. 그리고 1586년 5월 오사카에서 포르투갈의 예수회 일본선교 총책임자인 코엘료 신부(Gaspar Coelho)를 만났을 때 규슈 정복과 조선과 명나라 침공계획을 털어놓으며, 포르투갈 군함 2척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조선과 명나라 정복에 성공하면, 중국 각지에 교회를 지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5월 4일 포교허가증을 발급해주었다. 그러자 코엘료 신부는 정복지의 포교권 욕심에서 도요토미의 대륙 침략계획에 적극 찬동하면서 ‘규슈에는 예수회의 일본 선교 본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가톨릭 영주(領主)들도 있으므로 합동작전을 펼치는 것이 어떨지 묻기도 했다. 이보다 앞서 1585년 코엘료 신부는 기리시탄 다이묘들과 이들을 앞세운 포교활동을 지원하도록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예수회 본부에 함대 파견을 요청하기도 했는데, 당시 이런 생각은 코엘료 신부뿐만 아니라 많은 가톨릭 신부들도 같은 생각이어서 도요토미의 황당무계한 대륙 정복 야욕은 아니었다.

 

하지만, 코엘료 신부의 장담은 오히려 화가 되었다. 도요토미는 코엘료 신부를 비롯한 예수회 신부들이 규슈의 가톨릭 영주들의 군대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혹시라도 다이묘들과 결탁하여 나라를 빼앗을 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여기에 더 나가서 코엘료 신부는 후스타선 (Fusta船) 한 척을 건조하고, 대포도 몇 개 사더니, 그 배에 타고 일본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1586년 7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규슈에 상륙하여 평정에 나선 도요토미는 나가사키 곳곳에 예수회 깃발이 게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이묘들의 요새로 변하고, 또 노예무역이 대규모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코엘료 신부의 배에 승선하여 살펴보면서 ‘이것은 틀림없는 군함이다’고 단정했다. 그리고 곧바로 가톨릭 포교금지와 가톨릭 신부들의 출국을 명하는 5개 항목의 추방령 바테렌(Vateren: 反天連)을 내리고, 나가시키를 몰수하여 자신의 직할령으로 삼았다.

 

그러자 코엘료 신부는 이에 반발하여 기리시탄 다이묘들과 무력으로 대항할 것을 시도했으나 고니시 유키나가와 아리마 하루노부 등은 이에 반대했다. 코엘료 신부는 다시 필리핀 마닐라와 마카오, 인도 고아에 2~300명의 병력을 급히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보고를 받은 아시아지역 총책임자인 이탈리아 출신 알레산드로 발리냐노 신부(Alessandro Valignano)는 코엘료 신부의 강경책에 반대하고 유화책을 쓰기로 했다. 즉, 1582년 규슈의 첫 가톨릭인 다이묘인 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의 도움을 받아 10대 소년 네 명을 덴쇼 소년 사절단(天正遣欧少年使節)이라 하여 로마에 파견했는데, 나가사키에서 인도 고아를 거쳐 2년 6개월 만에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도착한 소년 사절단은 추기경과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펠리페 2세를 만나고, 1585년 3월에는 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3세를 알현했다. 그리고 베네치아·베로나· 밀라노 등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방문하고 1586년 4월 리스본을 출발하여 1587년 5월 인도 고아에 도착했다. 소년사절단은 고아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9년 만인 1591년 7월 9년 만에 나가사키로 돌아올 무렵에 일본은 도요토미에 의해서 가톨릭 포교금지와 사제들의 추방령이 내려졌다.

 

그러자 발리냐노 신부는 고아에 있는 포르투갈령 인도 총독의 사절단 자격으로, 소년들은 그 수행원 자격으로 입국하는 편법을 섰다. 1591년 3월 발리냐노 신부는 도요토미를 만나서 황금 장식을 붙인 아름다운 밀라노산 백색 갑주(甲冑) 2벌, 은장식이 붙은 장검 2개, 진귀한 두 자루의 총포, 야전용 천막 한 세트, 유화(油畫)와 아라비아산 말 두 마리 등을 선물로 바쳤다. 도요토미도 발리냐노 신부의 선물에 크게 기뻐하며, 발리냐노에게 커다란 쟁반 두 개를 주었는데, 하나에는 은 100매, 다른 쟁반에는 솜을 넣은 비단옷 4벌이 들어 있었다. 또, 그를 수행한 예수회 사제들에게 도 똑같이 은과 비단옷을 선물함으로써 포교금지령은 흐지부지되었다. 한편, 소년 사절단들은 항해용 지도, 서양악기, 구텐베르크 인쇄기 등을 갖고 와서 최초로 일본어로 성서를 인쇄하는 등 일본 근대화 촉진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가 도요토미가 임진왜란을 벌이기 직전이니, 우리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는지 알게 한다.

 

도요토미와 발리냐노 신부 간에 어떤 묵계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도요토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의 다이묘들이 풍토병과 황무지 개간 및 국내 안정 문제 등 갖은 이유로 출병 반대를 무릅쓰고 조선 침공을 강행했다. 1592년 4월 12일, 도요토미는 선봉장으로 고니시(小西行長)를 1군, 가토(加籐淸正) 를 2군과 구로다(黑田長政)를 3군으로 나눠서 보내면서 서로 경쟁하게 했다. 가톨릭 신자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불교도인 가토 기요마사가 점도 이용했다.


하지만, 도요토미 자신도 자리를 비우게 될 때 국내 정세를 안심하지 못해서 직접 참전하지 못하고, 규슈의 나고야성에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진두지휘했다. 참고로 영국의 저술가이자 뉴욕타임즈 칼럼니스트인 폴 존슨(Paul Bede Jhonson)은 그의 저서 “기독교의 역사”에서 예수회의 알폰소 산체스 신부(Alfonso Sanchez)는 명나라 정복계획에 마닐라와 마카오(澳門)와 광저우(廣州)에 머물러 있는 포르투갈군을 주력부대로 하고, 포르투갈에서 10,000 ~12,000명의 지원과 마닐라에서 5~6000명의 원주민 동원할 상세한 계획서를 제출하여 도요토미의 지지를 얻었다고 했다.

 

침략군들은 부산 동래에 상륙한지 불과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고, 각각 함경도와 평양 방면으로 진군했다. 하지만,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과 병참 연락을 막고, 조선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약으로 장기전에 돌입했다. 또, 그해 12월 명 참전으로 조총을 앞세운 왜군도 대포를 앞세우고 진격해오는 명나라군을 감당하지 못하고 1593년 명과의 강화 교섭이 시작되었다. 도요토미는 명나라의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비로 삼고, 조선 8도 중 4개 도를 일본에 할양한다 등 7개의 조건을 내걸었지만, 다시 군사를 일으키니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히데요시의 2차 출병은 오로지 조선 남부 지방의 약탈이 주목적이었으나, 1차 침공 때와 달리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과 의병의 활약, 명나라의 지원 등으로 왜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1598년 도요토미는 전쟁의 끝을 보지 못한 채 62세로 죽으면서 철군을 지시하고, 심복인 고다이로(五大老)에게 아들 히데요리를 부탁하고 후시미성에서 죽었다. 그러나 군사들의 사기를 고려하여 그의 장례는 비밀로 하고, 당일 아미다산에 매장했다. 도요토미의 죽음으로 조선 출병한 군사가 철수함으로써 7년간 끌어오던 전쟁은 막을 내렸다. 그 후 1600년 10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도쿠가와에 의하여 에도 시대가 세워졌다.

[ 이선용 gosiweek@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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