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최평오 교수 |
사건이 바뀌면 원칙도 바뀐다. 이것이 지난 석 달이 우리에게 보여준 민낯이다.
올해 6월, 배재고 야구부 학생들이 광주일고를 향해 "스타벅스 가야지"를 외쳤다. 스타벅스의 ‘5·18 탱크데이’ 논란을 연상시키는 조롱성 구호였다. 야구협회는 6개월 출전정지로 응답했고, 보수 성향 단체들은 그 징계를 문제 삼아 야구협회를 고발했다. 올해 9월,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다룬 영화 「암살자(들)」이 개봉됐다. 이번에는 입장이 뒤집혔다. 학생들에게 엄벌을 외치던 쪽 일부는 표현의 자유를 말하고, 학생들을 감싸던 쪽 일부는 역사 왜곡을 말한다. 원칙은 없고 진영만 있다.
먼저, 영화부터
영화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배후로 암시한다는 비판이 나왔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자서전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유감 표명을 전했다는 사실이 반박 근거로 거론됐다. 영화 측은 특정 인물을 배후로 규정한 바 없고 극적 설정을 사실로 제시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영화가 무엇을 말했는지는 관객이 보고 판단할 일이다. 그런데 "창작이니 건드리지 말라"는 말은 답이 아니다. 유족이 있는 현대사를 다루면서 어디까지가 사료이고 어디부터가 상상인지 밝히지 않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비판받지 않을 자유가 아니다. 방패로만 쓰려는 순간 그 자유는 낡아 간다.
역사 왜곡을 외치는 쪽에도 묻는다. 왜곡 여부를 판단하는 곳은 학계와 법정이지 집 앞 골목이 아니다. 배우 유해진 씨의 자택 주소가 공개되고 한 달 치 집회 신고가 이뤄졌다는 보도가 나왔다. 출연 광고 영상의 댓글창은 닫혔고, 홍보 일정은 줄줄이 취소됐다. 배우는 시나리오를 쓴 사람이 아니다. 비판은 영화를 겨눠야 한다. 집 앞에 찾아가는 순간 그것은 비판이 아니라 협박이고, 그 순간 영화의 잘못은 비판자의 잘못에 가려진다. 상영금지 같은 사전 봉쇄도 마찬가지다. 헌법재판소가 영화 사전심의를 위헌으로 본 것은 역사적 교훈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내가 막고 싶은 영화지만, 내일은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일 수 있다.
그리고 아이들
배재고 학생 선수 다수는 경위서에서 5·18과의 관련성을 몰랐다고 적었다. 일부는 문제의 소지를 알고 말렸다는 정황도 있다. 이들은 광주일고를 직접 찾아 고개를 숙였다. 잘못은 분명하다. 그러나 열일곱 살 학생의 실수와 다 큰 성인이 수년간 만든 작품을 같은 저울에 올리는 것은 둘 다에 대한 모욕이다. 아이들은 교육의 대상이지 정치의 소품이 아니다. 징계가 필요하다면 비례를 지켜야 하고, 그것을 이용해 진영 싸움을 하는 어른들은 자기모순부터 직시해야 한다.
해법은 거창하지 않다
어느 편의 일이든 같은 질문을 던지면 된다. 사실의 적시인가, 허구와 풍자인가. 피해자의 아픔은 무엇인가. 행위자는 성인 전문가인가, 미성년 학생인가. 대응은 비례적인가. 이 질문 앞에서 내 편이라고 봐주고 상대편이라고 몰아붙이는 순간, 비판은 정의가 아니라 취향이 되어버린다.
한 조사에서 2030세대는 표현의 자유(28%)보다 역사 왜곡 우려(전체는 58.2% 그중에서 30대는 73.8%, 20대는 65.7%)를 더 많이 꼽았다고 한다. 이를 두고 "젊은 세대가 자유를 가볍게 여긴다"고 개탄할 일도, "여론이 이러니 규제하자"고 기뻐할 일도 아니다. 여론은 법이 아니다. 그리고 2030세대는 이미 패러디라는 자기들의 방식으로 이 소란을 비웃고 있다. 어른들의 진영 논리가 얼마나 낡았는지를 가장 먼저 간파한 것은 어쩌면 그들이다.
자유는 내가 쓸 때만 고귀하고 남이 쓰면 위험한 것이 아니다. 역사 존중도 내 편의 기억일 때만 신성한 것이 아니다.
같은 잣대를 들 용기가 없다면, 누구를 비판할 자격도 없다.
역사를 존중하는 일도 결국 거기서 시작한다.
[저작권자ⓒ 피앤피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