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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창] 나라가 망하는 길_정승열 법무사(대전)

김민주 / 기사승인 : 2020-04-23 12: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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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열 법무사.JPG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파견해준 명의 황제는 만력제 신종(萬曆帝 神宗: 1563~1620)이다. 그는 유왕 주재후(朱載垕)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이름을 익균(翊鈞)이라고 하였다. 1567년 아버지가 황위에 올라 목종(穆宗)이 되자 그는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목종이이 즉위 5년 만에 죽자 1572년 그는 10살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다. 13대 황제인 만력제는 48년간 재위하여 역대 명 황제 중 최장수 황제였다. 그의 즉위 초기에는 스승이자 선왕 때부터 재상이던 장거정(張居正: ?~1582)이 국사를 도맡아 처리했다.
 
장거정은 중앙집권화와 황실과 관료계급이 소유한 면세토지에도 세금을 부과하는 정책으로 국고를 넉넉하게 하고, 국방을 튼튼히 했다. 장거정의 여러 개혁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일조편법(一條便法)의 시행이었다. 일조편법은 기존에 쌀이나 특산품 등의 현물로 세금을 걷던 것을 은으로 통일해 걷도록 하는 것으로서 명의 상업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사심 없이 일했던 장거정은 만력제가 제위에 오른 지 10년째 되던 해 죽자, 그동안 장거정의 반대로 기를 펴지 못했던 대신들은 입을 모아 장거정의 비리를 들추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만력제도 장거정이라는 거대한 통제관이 사라지자 기행을 남발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만력제는 황후가 낳은 왕자 상락(朱常洛: 1582~1520) 대신 총애하는 첩의 셋째에게 황위를 물려주려고 하는 황태자 책봉 문제로 대신들과 갈등을 빚었다. 조정은 태자 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반대파인 재야선비들을 중심으로 한 동림당과 찬성파인 비동림당으로 갈라져 당쟁이 격화되었고, 만력제는 무려 25년 이상 공식적인 접견과 조회를 거부했다. 모든 정무는 환관을 통해서 전달되고 상주 되었으며, 직언하는 대신은 태형(笞刑)으로 입을 막았다. 재상이 황제의 알현을 노심초사 기다리다가 입궐 허가를 받게 되자, 며칠 동안 기절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이런 시기에 선조의 서자인 광해군의 세자 책봉 주청이 만력제의 태자 책봉에 영향을 미칠 것을 두려워한 동림당의 반대로 광해군의 세자 책봉은 허락되지 못했다. 이러니 국정이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했다. 게다가 만력제는 주색에 빠져서 나라의 기강은 엉망이 되었다. 장거정이 10년 동안 알뜰하게 모아두었던 재정이 바닥나자, 만력제는 지방까지 관 조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관을 전국에 파견하여 광산을 열고 세금 징수에 나섰다. 파견된 환관들은 황제의 후광을 믿고 가렴주구가 극심하여 전국적으로 수많은 민란이 발생했다. 또, 중앙과 지방 관료들도 앞다퉈 전횡과 부정부패가 날로 심해졌다. 이런 정치적·사회적 혼란으로 산시성을 비롯한 북부 여러 성에서 이자성의 난 등 수많은 반란이 발생했다. 결국, 만력제는 19살이 된 장남을 태자로 책봉했다.
 
1620년 만력제가 죽자 황태자로 20년을 보냈던 상락이 39세에 태창제 광종(泰昌帝 光宗)이 되었다. 그렇지만, 황태자 시절부터 여색을 즐겨했던 그는 황제가 되자마자 최음약을 남용하여 즉위한 지 불과 29일 만에 죽었다. 기록에는 대외접대를 맡는 홍려시(鴻臚寺)의 시승(寺丞) 이가작(李家灼)이 바친 붉은 환약 두 알을 먹었다고 한다. 태창제의 맏아들 유교(由交)는 황태자로 지정될 겨를도 없이 곧바로 황제에 즉위하여 천계제 의종(天啓帝 毅宗: 1605~1627, 재위 1620~1627)가 되었다. 그러나 천계제도 후사가 없이 죽으니, 태창제의 다섯째 아들이자 천계제의 동생 유검(由檢: 1611~1644)이 16대 황제로 즉위하니, 숭정제(崇禎帝: 1627~1644)이다. 그는 이자성의 반란군에 쫓겨 자금성을 탈출했다가 경산에서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은 인물이다.
 
아이러닉하게도 만력제는 신종 13년(1585)부터 6년에 걸쳐 베이징의 명 13릉에 자신의 사후 무덤을 대대적으로 조성했다. 지하궁전인 정릉은 전실과 좌·우실, 그리고 후실로 나뉘며, 각 궁전은 복도를 통해서 연결되어 있다. 중앙에는 생전과 마찬가지로 황제와 황제비가 나란히 앉은 용상도 만들었다. 1956년 정릉을 발굴했을 때 금은보석 등 3,000여 점의 보물이 쏟아져 나와서 1959년 정릉 박물관을 세워서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마침내 만주족이 청(淸:1644~1911)이 중국 전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실력자 송시열이 제자인 권상하에게 지시한 만력제와 숭정제의 제사를 지낼 사당 청주 화양계곡의 만동묘(萬東廟)는 조선 성리학자들의 최고의 성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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