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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창] 왜구와 노예무역_정승열 법무사(대전)

이선용 / 기사승인 : 2022-06-13 09: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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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열 법무사.jpg


※ 외부 기고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일본은 삼국시대 이래 한반도를 셀 수 없이 침범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인명을 살상한 데 이어서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식민 통치까지 한 민족의 원수다. 한반도와 중국 연안까지 노략질한 일본인 해적을 왜구(倭寇)라고 하는데, 왜구의 침범은 고려 말~ 조선 초에 가장 극성이었다. 공민왕 때는 개경 입구인 강화도 교동과 예성강 어구까지 출몰하여 조정에서는 천도를 논의하기도 하고, 1389년에는 박위가 병선 100여 척을 이끌고 왜구의 소굴 쓰시마를 소탕하기도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조선 초기에는 사절을 파견하기도 하고, 귀화하는 향화왜인(向化倭人)을 받아들이는 유화책을 쓰다가 세종 원년(1419) 이종무가 쓰시마를 정벌하기도 했다. 세종은 삼포(三浦: 富山浦·乃而浦·鹽浦)를 개항하고 왜관을 설치하여 제한된 무역을 허용했지만, 1555년 5월 명종 때 을묘왜변 이후에는 교역이 단절되었다.

 

왜구가 작은 어선 1~2척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선단을 이루어 노략질한 배후에는 북규슈 일대의 토착 세력 이외에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무역상도 있었다. 왜구의 노략질은 시기적으로 대륙을 지배한 몽골이 1274년과 1281년 고려군을 앞세우고 두 차례 일본 침략에 대한 보복일 수도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무로마치 바쿠후(鎌倉幕府) 말 후계 다툼으로 남북조(1333 ~1392)로 갈라져 싸우느라 지배력이 지방에 미치지 못한 탓도 크다.

 

그런데, 우리는 왜구가 문화재를 약탈하고, 백성들의 재물과 노략질한 것으로만 알고 있지만, 수많은 백성을 포로로 잡아서 노예로 팔아 부를 축적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특히 정유재란 때 왜군은 전투부대와 특수부대로 나눠서 전투부대는 충청·경상·전라 등 하삼도를 정벌하러 나섰고, 특수부대는 후방에서 도서, 금속, 공예, 포로, 보물, 축(畜)의 6개 분야로 조선의 자원을 약탈하는 것이 주임무였다. 이때 왜적에게 잡혀간 조선인 즉, 피로인(被擄人)은 임진왜란 때와 비교할 수 없이 많았는데, 그것은 당시 일본과 무역을 하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상인들이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하여 전문적으로 노예무역을 취급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조선인을 마카오, 인도, 포르투갈령 식민지에 팔아넘겼고, 일본의 바쿠후도 무역상들로부터 화승총(철포)을 수입하는 댓가로 공공연히 노예 거래를 했다. 당시 나가사키는 포르투갈 상인들이 상가를 차릴 정도의 국제무역항으로서 수많은 조선인 노예가 거래되었는데, 조선인 노예가 얼마나 많았던지 노예 값이 대폭락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아프리카 노예는 170스쿠도, 페루 노예가 400 스쿠도였다고 하는데, 조선인 노예는 1인당 2.4수쿠도(scudo)에 포르투갈령 마카오를 거쳐서 유럽과 전 세계로 팔려나갔다. 당시 포르투갈의 화폐단위인 1수쿠도(scudo)는 쌀 두 가마 값에 해당했다고 한다.

 

스페인이 아프리카 흑인들을 남미와 멕시코에 팔아넘긴 노예무역 못지않는 비참한 현실에 일본에 진출한 예수회 신부들은 노예상들을 파문하고, 벌금을 물리기로 결의하였다. 또, 노예로 팔린 조선인들의 몸값을 대신 내주어 풀어주고, 가톨릭 신자들이 운영하는 나가사키의 신학교에서 보호하기도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당시 루이 프로세스 신부(Luis Frois)가 예수회에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나가사키에 조선인 노예들은 남녀노소 1,300명이 넘는다.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대부분은 2년 전에 세례를 받았다. 조선인 신자들은 오우라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으며, 일본인 순교 성인 중 26명 중 3명이 조선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될 만큼 성실한 신자들이었다.”

 

한편, 벨기에 출신으로서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 1640)는 궁중화가가 되어 귀족보다 화려하게 살았다. 그는 평생 조선은커녕 아시아에도 온 적이 없는데도 그의 그림 중 ‘한복을 입은 남자((Man in Korean Costume)’라는 그림이 1983년 11월 29일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드로잉화 경매사상 최고가격인 32만 4000 파운드에 팔려서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루벤스가 생존할 당시인 1600년경 ‘한복’을 입은 모델이라면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끌려가 노예상들에게 팔려 간 조선인이 분명한데, 그 무렵에 일본에 포교차 왔던 필렌체 출신 까를레티 신부(Francesco Carlatti)의 기행문에는 조선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조선인 ‘안토니오 꼬레아’에 대해 소개한 대목이 있다. 그는 코레아(Corea)는 9도(道)로 나뉘어 있으며, 조선(Ciosien)이라는 이름은 국왕이 거주하는 도시의 명칭이고, 경기(Quenqui)· 강원(Conguan)· 황해(Hongliay)· 전라(Cioala)· 함경(hienfion)· 충청(Tioncion)· 평안(Pianchin)으로 나뉜다. 이 나라의 해안에서 수많은 백성이 노예로 잡혀 왔는데, 그들은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헐값으로 매매되고 있어서 나도 12스쿠디(scudi)를 주고 5명을 샀다. 그들에게 세례를 준 다음에 인도 고아(Goa)에서 풀어주고, 한 사람만 피렌체로 데리고 왔다. 그는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이름으로 로마에서 살고 있다고 적었다. 루벤스가 1605년~1608년 사이에 이탈리아에 머물렀다는 기록과 연결 지어 보면, 카를레티 신부가 피렌체에서 풀어준 안토니오 코레아일 가능성도 있지만, Corea라는 이름은 ‘칼라브리아 지역뿐만 아니라 피렌체 가까이에 있는 리보르노에도 Corea라는 지명이 있고, 로마에도 Via del Corea라는 길이 있다.

 

또, 이탈리아 남부의 칼라브리아 지방은 일찍이 그리스의 영향으로 바다를 통한 해상교역이 활발했는데, 이곳의 알비(Albi)라는 작은 마을에도 약 2백여 명의 '안토니오 코레아'의 후손이 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자발적으로 머나먼 유럽까지 간 것이 아니라 일본에 의해서 포르투갈과 스페인 무역상들에게 노예로 팔려 간 조선인의 후손임은 분명한데, 당시 스페인은 마닐라와 멕시코를 식민지로 총독이 지배하며 정기무역을 했기에 노예상을 통해서 조선인들이 전 세계에 민들레 씨앗처럼 널리 퍼져서 살아가고 있음은 민족의 비애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617년 《광해군일기》 4월 19일 기사에 의하면, 정유재란이 끝난 20년 후에도 규슈 가고시마현 남쪽인 사츠마(薩摩藩) 한 곳에만도 3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붙잡혀 와서 살고 있다고 기록했다. 여기에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의 비애에도 불구하고 적반하장으로 무역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보면, 일본은 참으로 가깝고도 먼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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