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앤피뉴스 - [미국 로스쿨 출신 김형남 교수의 법블레스유] 대한민국 헌법은 어떻게 만들어졌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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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로스쿨 출신 김형남 교수의 법블레스유] 대한민국 헌법은 어떻게 만들어졌나?(5)

피앤피뉴스 / 기사승인 : 2025-01-17 15: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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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 제정 및 개정 비하인드 스토리
제5편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모태 4.19혁명

 

 

▲ 김형남 교수

제4편에서 서술했던 1960년 3월 15일의 부정선거는 아시아에서는 아주 드물게 성공한 민주주의 시민혁명이 바로 1960년 4월 19일에 발발한 4.19혁명이다.

1953년 7월 27일 길고 길었던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이 끝난 후 약 7년 만에, 그것도 모든 국토가 잿더미로 변해 어떻게 먹고 살지가 막막해서 한숨만 쉬고 있던 시기에 대한민국 국민은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민주시민 혁명을 실천했다는 사실에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다.

1950년대 언론인들은 최고 지식인계층에 속했다고 볼 수 있다. 친정부 스타일의 ‘서울신문’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논조는 이승만 정부에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사회 참여적인 성격이 몹시 강했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초기의 미국식 언론자유의 신념을 버리고, 언론탄압정책을 실시하는 독재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955년 발생한 동아일보 탄압사건이 그 좋은 사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관습적으로 대통령을 암시하는 단어인 ‘고위층’ 앞에 북한을 암시하는 ‘괴뢰’라는 단어를 붙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미 200여 부가 인쇄된 후, 급하게 회수 및 폐기처분하였지만, 결국 이승만 정부는 동아일보 발행인 및 편집인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불구속 입건하였다.
또한, 같은 해 대구 매일신문은 정치깡패들을 비호하는 경찰 당국의 황당한 주장인 “백주대낮의 폭력은 테러가 아니다”는 신문기사를 실어서 전 국민의 공분을 자아내고 말았다.

당시의 시대상은 이와 같았으며, 전술한 바와 같이 이승만 정부는 언론에 대한 탄압, 정치깡패들을 동원하여 테러행위 및 날조, 공작행위들을 일삼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은 더 커지고 있었다. 우리 국민들의 이러한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의 근원은 당시의 교육열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제1공화국 정부의 1년 총예산의 10.5%는 교육 관련 지출이었다.

이외에도 초등학교 의무교육제도가 채택되면서 빈민층일수록 더욱 학구열이 대단했다. 아마도 교육을 통해 신분 상승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일종의 기대감 때문이었다.
1945년부터 1960년까지 학생 수가 3배로 증가했으며, 같은 기간 동안 문맹퇴치사업을 펼쳐 문맹률이 급속도로 떨어졌다. 특히 대학을 진학하려는 전국적인 분위기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높은 대학진학률을 기록하게 되었다.

또한, 4.19혁명의 또 하나의 원인은 이승만 대통령이 80대의 고령에 접어들자, 정치적 판단력이 약화되어 고위직 공무원들의 권력형 범죄들을 눈감아주는 사례가 확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원인들이 4.19혁명의 간접적인 원인이라면, 역시 직접적인 원인은 수족처럼 부리던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저질렀던 1960년 3.15부정선거라고 할 수 있다.

선거 당시 발생한 부정과 폭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먼저 경찰과 정부 당국은 선거 전에 이미 투표함에 30~40%의 이승만과 이기붕에게 기표된 투표지를 미리 넣어놓았다. 또한 선거 당일날 완장부대와 정치깡패들을 동원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장해서 투표하러 온 시민들을 겁박하였다.
투표 당일인 1960년 3월 15일에는 광주 금남로에서 최초의 시위가 일어났으며,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곡 민주주의 장송’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전진하다가 진압과정에서 약 10여 명이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한편 마산에서는 아침부터 마산시 장군동 제1투표소에서 부정선거가 적발되자 분노한 시민 3,000여 명이 민주당 경남도당사와 불종거리 등에서 강력한 시위를 벌이게 되었다. 이때 경찰의 발포로 김주열 열사를 비롯한 9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역사적인 날짜가 돼버린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르면서, 전국적인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가히 전국적으로 민주시민과 대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독재정권 타도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주장하면서 불타오르던 혁명의 날들은 4월 26일 화요일 오전 10시 20분경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발표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승리로 끝났다.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내가 왜 대통령직을 사임해야 하는가?”, “만약 내가 사임하면, 우리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빠질 것이다!”라는 망언을 내뱉으면서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정렬 등의 최측근들과 영부인이었던 프란체스카 여사의 강력한 설득으로 드디어 오후 2시쯤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였고, 오후 3시쯤 사임서가 수리되면서 당시 헌법규정에 의해 외무장관 허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됨으로써 역사적인 4.19혁명은 대한민국 시민 민주주의의 승리로 기록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4.19혁명은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명시된 국민주권주의를 아주 오래전인 1960년에 온 국민이 실천하였다는 뜻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지금 이 시각뿐만 아니라 향후 영원토록 대한민국의 권력자는 대통령이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다.

김형남 교수
캘리포니아 센트럴 대학교, 단국대, 경성대 법대 교수 | 법학박사 | 미국 워싱턴 주 변호사 | 세계헌법대회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 성균관대학교 법학연구원 연구위원 | 15년간 법무부 법조인력정책과 사법시험 제1차시험 출제위원, 제2차시험 출제위원, 제3차 면접위원 | 15년간 행정안전부 국가고시센터 출제위원, 선정위원 및 면접위원 (행정고시, 5급 승진시험, 국가직 7급·9급, 지방직 7급·9급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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