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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9년 10월 2일, 선조는 황해감사 한준(韓準)이 보낸 비밀 장계를 받았다. 승려 의암의 밀고와 정여립의 제자 조구(趙球)의 자백으로 역모 사실을 알게 된 안악군수 이축(李軸)이 황해감사 한준에게 보고하고, 한준이 조정에 장계를 올린 것이다. 선조는 즉시 정철(鄭澈)을 우의정으로 발탁하고 이 사건의 조사책임을 맡겼다.
전라도 금구 출신인 정여립(鄭汝立)은 기대승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25세 때 과거에 급제했는데, 이이의 천거로 벼슬에 오른 그는 당시 집권 세력인 동인에 들어갔으나, 이이가 죽자 이이를 배반하고 성혼을 헐뜯자 선조의 미움을 받고 낙향한 인물이다. 정여립은 고향에서 별장을 짓고 무뢰배와 공·사노비들을 모아서 ‘대동계(大同契)’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매월 활쏘기를 익히고, 당시 민간에 유포되어 있던 도참설을 이용해 민심을 현혹했다. 특히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천하는 공물(公物)’이라는 전제 아래 혈통에 의한 왕위 계승을 부정하고, 주자학의 '불사이군론'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1589년 10월 8일 정여립을 체포하기 위해 의금부 도사들이 전라도 금구로 달려갔으나, 그는 이미 황해도 안악에 사는 변숭복(邊崇福)으로부터 자기 제자였던 조구가 자백했다는 말을 듣고 변승복과 함께 진안에 숨었다. 진안 현감이 관군을 이끌고 정여립의 뒤를 추격하자, 정여립은 변승복과 자기 아들을 죽이고 자결했다.
그런데, 예조판서와 대제학으로 있다가 1585년 동인의 탄핵을 받고 낙향하여 있던 서인 정철이 위관(委官)으로 임명되자, 이 사건을 계기로 동인에 대한 앙갚음과 확실하게 정권을 장악할 기회로 삼으려고 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정철 자신이 전라도 담양 출신이었고, 또 정철의 집에 기거하면서 동인들의 처벌을 조종한 송익필(宋翼弼)은 충청도 출신으로서 할머니 감정(甘丁)이 천첩 출신이었으나 아버지 송사련(宋祀連)이 안처겸의 역모 사건을 고발한 공으로 공신에 책봉되면서 명문자제들과 교유하게 되었다. 그런데, 1586년 이발·백유양 등 동인에 의하여 안처겸의 역모가 조작된 사실로 밝혀져 할머니 감정의 후손들 70여 명이 모두 노비로 환속되자, 그들은 변성하고 도피 중인 때여서 송익필의 처신도 순수성을 의심받고 있다.
정철이 정여립의 아들 옥남(玉男)을 심문 끝에 길삼봉(吉三峯)이 주모자라 하고, 또 동인의 영수 격인 이발(李潑)은 정여립의 집에서 자신이 보낸 편지가 발견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또, 이산해(李山海)·정인홍 등도 관직에서 밀려났고, 조식의 제자 최영경(崔永慶)도 역모의 또 다른 괴수 길삼봉(吉三峯)으로 지목되어 옥사하고, 서경덕의 제자 정개청도 옥사하는 등 3년여 동안 정여립과 친교가 있거나 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처형된 자가 무려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를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 하는데, 기축옥사는 선초 훈구파와 사림파가 대립하며 벌인 무오. 갚자·기묘.을사 4대 사화를 압도하는 일대 사건으로서 이후 동인 세력은 크게 위축되고, 정국은 서인이 주도하게 되었다. 또, 전라도는 반역향(反逆鄕)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서인의 지나친 동인 보복과 세력 확대는 선조의 반발을 가져와서 불과 3년 뒤인 1592년 좌의정이 된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을 건의한 건저의 사건으로 실각했는데, 동인은 정철의 처리를 놓고 강온파로 갈라졌다. 온건파는 학문적으로 이황(李滉). 류성룡의 학통을 잇고, 지역적으로는 경기와 경상좌도를 중심으로 하는 남인이었고, 강경파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주도권을 잡은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하는 조식과 서경덕 계열의 북인이었다.
기축옥사는 붕당정치의 운영 방식이 미숙하여 빚어진 것이고, 건저의 사건은 기축옥사에 대한 보복으로서 기축옥사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설이 다양하다. ① 노비 출신인 송익필이 당시 서인의 참모 격으로 활약했는데, 그 자신과 친족 70여 명을 다시 노비로 전락시키려는 동인의 이발·백유양 등에 복수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다는 설. ② 당시 위관(委官)이던 정철이 동인에 의한 탄핵과 실각에 대한 보복심에서 확대 조작되었다는 설. ③ 이이가 죽은 뒤 열세에 몰린 서인이 세력을 만회하기 위하여 날조했다는 설. ④ 일부 조작이 있지만, 정여립이 전제군주정치 아래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선양(禪讓)에 의한 왕위계승방식을 주장하는 등 혁명적인 주장이 요인이 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그런데, 400년 뒤 유신 정부를 쓰러뜨린 10·26· 사건 후 이른바 ‘서울의 봄’을 노래하던 중에 정치군인들이 12.12. 내란으로 패권 다툼을 벌이더니, 이듬해 5월 18일 소위 ‘광주사태’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하고 구국의 영웅으로 화려하게 집권에 성공했다. 그렇지만. 한세대도 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진상이 밝혀져 내란죄로 처단되고, 억울하게 희생된 민중들은 민주화운동의 희생자로 추앙받는 역사가 반복되는 혼돈 속에서 살고 있다. 또, 오늘의 정치상황도 정권 쟁취를 위하여, 또 정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마치 기축옥사와 비슷한 작태를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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