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앤피뉴스 - [미국 로스쿨 출신 김형남 교수의 법블레스유] 대한민국 헌법은 어떻게 만들어졌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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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로스쿨 출신 김형남 교수의 법블레스유] 대한민국 헌법은 어떻게 만들어졌나?(2)

피앤피뉴스 / 기사승인 : 2024-06-25 13: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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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대한민국 헌법 제1차 개정-참혹한 발췌개헌

 

▲ 김형남 교수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이후 76년 동안 총 9차례의 헌법 개정이 있었다.
이는 세계사를 통틀어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은 횟수의 헌법개정이라고 볼 수 있다.
1948년 7월 12일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이 제정된 지 약 4년 후인 1952년 7월 4일 임시수도 부산에서 제1차 헌법개정안인 발췌개헌안이 의결되었다.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주장하는 이승만 정부의안과 내각책임제와 단원제를 주장하는 한민당의 안을 발췌하여 절충하였다고 해서, '발췌개헌'이라고 지칭한다.

당시는 주지하다시피 6.25전쟁 중인 1952년이었다. 북한군의 불법적인 군사도발로 시작된 민족상잔의 최대 비극이 1950년 6월 25일 시작되어, 수많은 군인들과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가고 있을 때 이승만 정부는 대통령직선제로의 개헌을 통해 재선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살펴보면, 이승만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친일지주세력을 등에 업은 한민당 세력과 손을 잡아 헌법제정에 성공하였고, 국회의 간접선거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고려대학교를 설립, 친일 자본가이면서 한민당의 당대표였던 김성수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자신을 후원한 한민당을 외면하였고 한민당은 복수심에 이를 갈고 있었다. 결국 당시 대한민국 국회 내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을 재선시킬 의원이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상황을 이용하여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킬 전략을 짜게 되었다.

먼저 개헌안을 제출한 것은 한민당이었다.
1952년 4월 17일 한민당 곽상훈 의원을 비롯한 123명의 국회의원들은 내각책임제를 중심으로 한 개헌안을 발의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에 대항하여 정·부통령 직선제와 국회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개헌안을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부개헌안은 이미 1952년 1월 18일 국회 본회의에서 총투표 163표 중에서 가 19, 부 143, 기권 1표로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된 바 있었다. 부결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이승만 대통령이 다시 들고나온 것은 국회 세력 분포로 볼 때, 국회에서 간선제로 대통령을 선출할 경우에 자신의 당선 가능성이 매우 적었기 때문이었다.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기성 정당 정치인들이 대거 탈락해 총 210명의 국회의원 중에서 재선은 29명에 불과하고 3분 2인 126명이 무소속일 정도로 신진 정치세력 중심으로 물갈이가 이루어졌던 것도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고집하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이후 이승만 정부는 전쟁 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대통령직선제 개헌 관철 폭압정치를 시작하게 된다. 내각책임제 개헌반대 관제 데모가 일어나고 백골단, 땃벌떼 등 정체불명의 폭력조직을 이용하여 국회 해산을 요구하며 국회를 포위하는 등 갖은 폭력행위를 자행하였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구실로 삼아, 그해 4월 25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이렇듯 국회와 정부가 극심하게 대립한 가운데 국회가 제출한 내각책임제 개헌안과 정부가 제출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은 절충을 거쳐서 발췌개헌안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민족최대의 비극인 6.25 전쟁이 한참이었던 1952년 7월에 드디어 이승만 정부는 천인공노할 폭거를 저지르게 된다.

1952년 7월 3일 임시수도 부산에서 이승만 정부는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반대하던 국회의원들을 군인과 조직폭력배를 동원해서 총기로 위협하여 27시간 동안이나 부산 임시 국회의사당에 불법감금을 하고야 말았다. 만 하루 하고도 3시간이 지난 후에 기진맥진한 국회의원들을 심야에 국회의사당으로 소집한 뒤에 총기로 위협하면서 발췌개헌안에 대해 표결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출석의원 166명 중 가 163표,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은 최종 의결되고야 말았다. 이렇게 세계에 유례가 없는 가장 폭력적인 헌법개정, 즉 발췌개헌이 우리 헌정사에 또 다른 비극으로 기록되고야 만 것이다.

캘리포니아 센트럴 대학교, 단국대, 경성대 법대 교수 | 법학박사 | 미국 워싱턴 주 변호사 | 세계헌법대회 조직위원회 사무총장 | 성균관대학교 법학연구원 연구위원 | 15년간 법무부 법조인력정책과 사법시험 제1차시험 출제위원, 제2차시험 출제위원, 제3차 면접위원 | 15년간 행정안전부 국가고시센터 출제위원, 선정위원 및 면접위원 (행정고시, 5급 승진시험, 국가직 7급·9급, 지방직 7급·9급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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