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다. 나의 무덤에도 같은 비문이 쓰이길 원한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 싶은 이들은 많다. 이것을 실천하는 것은 어렵다. 어렵지만 세상에 어느 누구는 ‘조르바’처럼 세상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간다.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조르바’와 지식인인 ‘나’를 화자로 세워 두었다. 크레타섬으로 떠나는 카페 안에서 키가 훤칠하게 크고 깡마르지만 냉소적이면서 강렬한 눈매를 가진 60대 노인 ‘조르바’가 다가오면서 둘의 여정이 시작된다.
‘나’는 내 안의 욕망이나 감정보단 이성으로 판단하고 책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이 옳다고 믿는다. '나'에게는 사랑도 그러하다. 욕망을 억제하고 두려워한다.
그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지만 크레타섬에서 ‘부불리나’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지만 ‘조르바’는 너무 태연하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태연한 그가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조르바’에게 사랑 또한 정열을 가지고 매 순간 그녀를 사랑했고 과거와 미래보단 현재에 충실했기에 후회나 미련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결국 둘의 탄광 산업은 실패로 돌아가 빈털터리가 된다. 나라면 사랑하는 사람도 잃고 사업도 망했다면 절망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부터인가 ‘조르바’처럼 변한 자신을 발견한다. 내 안의 또 다른 자아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에서 속 시원하게 행동하고 현재를 즐기는 ‘조르바’와 같은 모습이다. 빈털터리가 된 자신에게 오히려 해방감을 느끼며 ‘조르바’와 함께 춤추고 노래한다.
<그리스인 조르바> 의 화자인 ‘나’는 작가 자신이다. 작가는 비로소 자유를 느끼게 된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내 안에도 현실과 타협한 현재의 자아와 ‘조르바’와 같은 삶을 원하는 자아가 존재한다. 나는 조르바와 같은 삶을 원한다.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부딪히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 조르바처럼 춤추고 싶으면 춤추고 노래하고 싶으면 노래하고 싶다. 그러나 조르바의 삶이 옳지 않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남의 시선을 느끼는 나는 세상의 굴레의 얽매여 있는 자아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해 본다.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누구나 꿈꿀 수 있다. 꿈이란 실현가능여부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꿈의 가치는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꿈과 희망은 차이가 있다. 희망은 가능성이란 것이 내포되어 있다. 가능성을 점점 높게 만들도록 노력하는 것이 내가 자유로워지는 첫 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조르바처럼 살 든 ‘나’처럼 살든 선택은 내 몫이다. 후회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행복한가?’의 대한 나의 대답이다. 매 순간 희망을 품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자 노력한다면 나도 춤추며 노래할 수 있는 그 날이 올 거라 믿는다.
-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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